하루 종일 모니터에 그려진 청색과 황색의 띠만 보고 있는 건 그다지 유쾌한 작업이 아니다. 그 일을 산 속에 파묻힌 작은 건물 안에서 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히카와 사요는 그런 점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이유로 이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다고 외딴 곳에서 혼자 모니터만 쳐다보는 걸 좋아하냐고 하면 당연히 아니다. 다만, 여기 오기 싫은...
아무리 방한장비를 준비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2월의 추위를 막기엔 윈드스크린 만으로는 역부족이라 코구마는 국도 52호를 달리는 중간중간 몸을 움츠리거나 작게 떨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 후회는 없었다. 자업자득이긴 했어도 원래 달리는 게 좋았기 때문에 검은 글자, 거기에 흔치 않은 겨울바다를 보고 왔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남는 장사였다. 이미 큐슈 초입까...
“카이, 말을 준비해주세요. 아렌델에서 가장 빠른 말로요.” “예, 폐하.” 언제나와 같은 집사의 웃음이었지만, 왠지 오늘따라 다 알겠다는 식의 웃음으로 느껴져 더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곧 날이 저물텐데 외투도 준비할까요?” 그 말에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니 이미 해는 바다를 건너 서쪽 산에 걸려 있었다. “네,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곧 준비하...
으음...에리치…?” 침대에서 뒤척이던 노조미는, 에리에게 내어 주었던 팔이 가볍게 느껴지는 것에 놀라 눈을 떴다. “에리치이~ 씻는 중이가?” 여전히 졸린 눈을 비비며 말 끝을 길게 늘여 물었다. 조금 기다려도 에리의 대답이 없어서, 노조미는 축 늘어뜨린 몸을 천천히 움직여 침대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에리치이~ 어딨노~” 작은 하품을 하며 거실로 나...
“더는 못 마시겠어요...” 몇 잔 째인가의 술잔을 훌훌 털어버리던 미유는, 늘어지는 말꼬리처럼 천천히 테이블에 얼굴을 묻듯이 무너졌다. “어머, 미유씨?”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던 카에데는, 별다른 말도 없이 카드를 점원에게 내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유를 어르듯이 그 어깨를 등받이 쪽으로 잡아당겨 일으켰다. “자자, 어른이는 이제 집에 들어 갈 시간...
“이마이씨 갑자기 무슨 일인가요?” “어, 사요!” 벌컥 열린 스튜디오 문으로 들어오는 조금 높은 톤의 목소리. 옷도 아무거나 걸쳐 입고 얼굴에 땀까지 흐르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리사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기대어 있던 앰프에서 튕기듯이 일어나 폴짝 사요에게 다가간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죠?” “그게~ 좋은 가사가 떠올라서말야~” 내밀어진 종이를 ...
“전철...도 많이 복잡해졌네요.” 라고 미안한 듯 기어가는 목소리로, 아이의 한걸음 뒤에서 준코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오늘의 약속, 번화가에 가자는 말은 쥰코가 먼저 꺼냈었다. 다만 언제까지나 아이에게 부탁할 수만은 없다고, 사후 두 번째로 바뀔 연호에 익숙해져야 하니까 약속장소까지는 스스로 가겠다고 그렇게 얘기해 놓았었다. 하지만 35년...
“이상하네.” 라고, 히카와 사요는 여기까지 걸어오는 내내 생각했다. 그렇다고 뭐가 다르냐고 묻는다면 콕 찝어 얘기할 수는 없었다. 이 통학로는 평소대로 사람이 북적이고 있었으니까. 북적이라는 단어까지 떠올리고 나니 드디어 위화감의 정체를 깨닫고는 이내 한숨을 쉬어버렸다. “조금만 더 일찍 나올걸 그랬네.” 날짜를 헤아려보니 14일. 전국이 소란스럽다고 할...
오늘의 오토노키자카는 꽤나 씨끄러웠다. 오픈 캠퍼스도 아닌데 교복을 입은 학생보다도 교복을 입지 않은 손님이 더 많아보였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더 멋진 풍경을 찾아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소리, 하나 둘 셋 하는 소리와 찰칵 하는 소리. 빨간 리본으로 묶인 두루마리를 든 학생과 꽃다발까지 들고 있는 학생, 그 옆을 둘러싸고 있는 나이 많은 사람이나 나이 ...
평소와도 거의 다름없는 하루였다. 적당히 수업을 듣고 대충 시간을 때우다가 한낮이 조금 지날 때쯤 부활동도 하지 않고 동급생에게 성의 없는 하교 인사를 건네며 느긋이 집에 가는 평범한 일상. 입학생 수가 줄어들어 이제 남은 학급은 6개밖에 되지 않는 학교. 폐교에 대한 소문도 떠돌고 있지만 아야세 에리에게는 어찌 되도 좋을 이야기였다. 할머니부터 어머니를 ...
히카와 사요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도록 상체는 숙인 채로, 전화기를 든 양손을 무릎에 받히고. 조금 전에 도착한 ‘지금 갈게.’라는 메시지. 이런 문장을 쓸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이유도, 시간도, 날씨도 사요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예언과도 같은 그 문자의 실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띵동, 하고 초인종이 울리자 사요...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새벽에 잠결로 어디 가냐고 물어왔을 때 호출이야. 하고 퉁명스레 대답했던 게 떠올랐으니까. 사실 아무 생각도 없었다. 이르다 못해 이제 막 잠에 들 시간에 갑자기 전화가 걸려와서 지금까지 병원에 있었다. 긴급한 환자라나. 병원에 모든 과가 달라붙어도 모자라서 수련의 손도 빌려야 할 정도로 심각한 환자였다. 전화의 목소리는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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